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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를 마셔 마음이 고요해지니 세상이 삽상(颯爽)하다 - 한국다도의 종가, 명원문화재단 김의정 이사장
  • 기사등록 2013-08-19 00:14:30
  • 기사수정 2013-08-19 00: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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끽다거(喫茶)’. 무엇을 행하는 누구이든 어쨌든 차나 한 잔 하고 가라는 말이다. ‘를 음미(吟味)하면서 다도(茶道)를 행하는 동안 깨달음을 얻으라는 속 깊은 이치가 있다.

 

다선일매(茶禪一味). 차를 마시는 행위가 일종의 선()적인 세계와 맞물려 있음을 짐작케 한다. 오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나라치고 고유의 문화를 가지지 않는 나라는 없다.

 

당연히 우리나라의 차 문화도 오랜 역사와 예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라가 환란에 처해 잠시 그 전통이 단절된 시기에 사람들은 기억을 잃고 이국의 차 문화를 추종하며 내세우기도 했다. 선구자적 자각으로 이런 세태에 종지부를 선언하며, 우리 고유의 차 문화를 복원하고 계승하해 그 절등함을 전파해오는 명가가 있다. 명원문화재단은 한국전통 차례(茶禮)의 종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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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를 이은 다도(茶道)에의 전념

1995년에 설립된 명원문화재단은 한국 전통 와 관련된 모든 문화적 활동을 전방위적으로 펼치고 있다. 한국 전통 다례를 집대성해 재현하고 전수하며 이를 일반화 시킨 명원다례, 그리고 지리산 야생차 명원다원에서 생산되는 한국 황후차의 보급, 차에 관한 정신문화와 역사에 관한 학술 주도 등 차()로 환원되는 모든 것들이 명원문화재단의 너른 영역 안에 있다. 규모로 따지자면 재단은 전국에 수많은 지부와 다회를 두고 더 나가 미국 등 주요 해외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히 한국 다도의 태두라 함에 이의를 달지 못할 위업이다.

 

현재 명원문화재단을 이끄는 이는 2대 명원(茗園) 김 의정 이사장이다. 1941년생인 그녀는 곱고 기품 있는 자태로 한국 전통차 문화의 소개와 전파를 위한 어느 곳에서든 외유내강한 힘으로 현장을 견인한다. 그녀는 문화훈장 옥관장을 수훈한 문화계의 공로자이고, 궁중다례의식 보유자로 서울시무형문화재 27호를 지정받기도 했다. 김 이사장의 이러한 이력을 상찬할라치면, 그녀는 단지 어머니를 찾아가듯 다도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라며 겸손해한다.

 

김 의정 이사장의 어머니인 1대 명원(茗園) 김 미희 선생은 일제침탈과 한국전쟁의 척박한 현실속에서도 한국 전통 차의 참의미를 발견해내고, 이의 발굴과 정립에 혼신을 다한 인물이다. 2000여년의 역사를 품은 한국 전통 다례법을 궁중다례, 사원다례, 접빈다례, 생활다례로 정리하고, 1980년 한국 최초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차 문화 학술대회를 개최해 차 문화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이정표를 마련하는 용기와 추진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한국 전통 차의 표상으로 여겨지는 초의 선사가 다도를 행하던 전남 대흥사의 소실됐던 일지암을 복원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녀의 사후 정부는 이런 업적을 기려 문화 훈장보관장을 추서했다. 대를 이어 차 문화를 보급하는 모녀에게, 대를 이어 훈장을 수여하는 유례없는 명예를 인정한 것이다.

 

개인의 타고난 행복을 사회와 나누고

코엑스에서 만난 김 의정 이사장은 무척이나 분주해보였다. 이제 막 행사를 끝내고 한숨 돌리는 시간이었지만, 경내에서 오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진심어린 반가움으로 인사를 건냈기 때문이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그녀의 인품이 주변에 어떤 후광을 주는지 짐작이 갔다. 충분히 단정할 수 있는 일이지만, 김 이사장 평생을 와 절대 동반하면서 정련해낸 힘이었을 것이다.

 

김 의정 이사장은 차 문화에 관한 어떤 이야기든 어머니 명원 김 미희 선생을 먼저 거론한다. 어떤 계기로 차에 입문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에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차를 좋아하고 깊이 있게 드셨다. 나는 그릇을 좋아했었는데 자연 어머니가 마시는 다기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대답이다. 명원재단의 내력을 명원 김 미희 선생의 족적과 궤를 같이한다. 명원 선생은 개인으로선 부러울만한 행복을 가진 이였다. 부군이 쌍용그룹 창업주이면서 4선의 국회의원으로 재물과 명예를 함께 가진 집안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원은 개인의 욕망에 치부하지 않고 사회국가적 대의와 차 문화 보급을 위해 사재를 미련없이 투척한 사람이었다. 김 이장이 전해주는 일화는 명원 선생의 여장부적인 기질과 기민하고도 섬세한 감수성을 느끼게 한다. 한국 전쟁의 부산 피난시절, 부모님이 이승만 대통령과 친분이 있었는데 국가 재정이 어려워 52년도의 헬싱키 올림픽에 선수를 파견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여권조차 만들기 힘든 시절이었다.

 

김 이장의 아버님은 아무리 나라가 어려워도 올림픽에 출천해야 국력도 신장된다면서 10명의 선수 참가비용을 모두 지원했다고 한다. 마침 명원 김미희 선생이 선수들과 동반하게 되었는데, 유럽을 경유해 돌아오는 길에 명원 선생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덴마크에서 오찬 초대를 받았는데, 식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모두 제복을 입고 시중하는 자세, 그릇 놓은 태도 같은 것들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답니다.

 

영국에서는 애프터눈 티tea를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잘 갖춘 정장과 흐르는 음악, 테이블 세팅, 도자기, 꽃꽂이 등 우아한 격식에 맞춰진 것을 보고도 충격을 받았지요. 그런 생각이 드셨답니다. 우리나라도 오래된 차의 역사가 있지만 가난해서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구나, 라고...”귀국하자마자 우리나라 전통 차의 흔적을 찾아 사소한 것이라도 추적하고 발굴해내는 명원선생의 새로운 사명이 시작되었다.

 

차에 대한 학술적 기반을 마련하다

당시에는 일본의 압제를 겪으면서 한국 전통 차의 맥이 단절되고 일본 다도가 그 자리를 메꾸던 시기였다. 한국 다도의 절멸 위기가 명원선생의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전국의 사찰이나 스님들은 물론 차의 명인이라고 소문난 이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일본 다도를 사용하고 있어서 실망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본능적인 촉수처럼, 차에 대한 명원 선생의 소명의식에 가까운 행보는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 때 경복여고 시절, 어머니는 공부 잘하는 여학생이어서 학교에서 행하는 일본식 다도 예절 강습에 꼭 불려갔답니다. 그때 맘속으로 저항을 느끼며 민족의식을 가졌던 것 같아요. 그 마음이 간직돼 있다가 외국 풍습을 경험하면서 차에 대한 탐구로 나타난 거죠. 우리의 차 원형을 찾아야 겠다. 아무리 사소한 기록, 작은 연고라도 다 찾아다니셨습니다.”

 

이런 명원 선생의 행적에 주변에서는 질타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시절 좋게 무슨 차 타령이냐는 비난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명원 선생에게도 재력과 의지와 문화적 지성과 무엇보다 부군의 외조가 있었다. 사회적 인식 부족 속에서도 사찰, 서적, 다기 명인, 다인 등 모든 실마리를 모색했다. 또 그들이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도록 연구비를 지원하고 장인들에게 다구를 제작할 가마를 지어주고 백자, 청자, 분청사기 등을 트럭으로 실어다 주며 본보기를 제공했다고 한다.

 

명원 선생은 순종의 왕후였던 윤씨와 마지막 상궁 김명길 씨를 만나면서 눈에 띄는 결실을 맺게 됐다. 이 두 분에게서 궁중의례와 다례를 전수받은 것이다. 그리고 198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 최초로 차 학술 발표와 시연을 성사시키게 된다. 그러나 지나친 심혈 때문이었는지 이듬해 이른 나이에 타계한다. 어머니가 일궈낸 차의 역사가 없었다면 아직까지 일본 것을 우리의 차 문화라고 생각하고 사용했을 겁니다.” 김 의정 이사장의 너무도 타당한 자부심의 말이다.

 

명원문화재단에서 자리매김한 한국 다례

김 의정 이사장이 명원문화재단을 세운 건 어머니의 유훈도 있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 분의 업적을 마치 자신의 것 인양 오도하고 내세운 이들에 대한 속상함도 있었다. 주변인들의 평에 의하면 김 이사장은 다른 큰일을 도모해도 능히 해낼 도량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내가 딴 것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다도를 자연스럽게 이을 사람 나밖에 없다. 물려받은 재산 다 넣으면서...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물론 재단을 세울 때 어머니가 당한 것처럼 주위에서 돈만 있지 아무것도 모른다, 며칠 하다 그만두겠지하는 투로 시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일부는 그들이 가로 챈 어머니의 업적을 김 이사장이 나타나 밝히자, 그 불편함을 공격으로 나타낸 경우도 있었다. 김 이사장은 자신이 명원문화재단의 설립을 통해 어머니의 선구자적인 행보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바로 명원 김 미희의 것이라는 것이 밝혀져 정말 다행이라고 말한다.

 

김 이사장이 물려받은 문화적 정신은 국가적 염원이었던, 일본에 침탈당한 조선왕조의궤와 더불어 조선왕조발간도서 1000여권을 회수해 오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문화재환수위원이었던 그녀는 한국 다도(茶道)의 예법과 정신으로 환수활동에서 만나는 일본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일본도 차 문화가 발달한 나라여서 다인(茶人)을 예우해 주는 풍조가 있기 때문에 자신을 ()선생이라고 소개했더니 대우의 시선이 달라졌다고 한다.

 

어머니가 좋은 강사를 붙여서 배우게 했던 일본어도 소통에 절대적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결국 김 이사장의 공적은 어머니의 공적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독실한 불교도인 김 의정 이사장은 불교신도회 50년 사상 첫 여성 중앙신도회장으로 추대돼 연임을 했다. 어느 분야에서든 아직까지 남성의 영역에 여성이 첫 진출을 하면 곱지 않은 시선이 있기 마련인 것을 곧잘 확인한다. 김 이사장의 회장 취임도 그랬다. 김 이사장을 잘 이해하는 큰 스님들은 여자가 신도장이 되어 잘 해낼 수 있을까 염려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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